[D+365]5일차 농장에서
2016.09.20
이탈리아의 땅에 발을 디딘지 정확히 365일째가 되는 날이다.
어쩌다보니 내 곁에 개 한 명과 사람 한 마리가 생겼고
어쩌다보니 나는 시칠리아의 농장에서 호두를 따고 있었다.
녹색껍질에 금이 간 것은 호두가 알맞게 익었다는 표시로, 손에 닿는 것을 따거나 땅에 떨어져 있는 호두를 주워 돌맹이로 내려찍는다.
그 안에서 흔히 보던 호두의 모습이 발가벗겨진 채 드러난다.
그가 호둣물이 손에 뭍지 않게 조심히 까야한다고 했건만 결국 손 여기저기에 뭍게 됐다.
노랗게 물들더니 점점 새카맣게 변한다.
(호두로 천연염색약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이왕 새까매진 손, 호두나 많이 따자는 나의 생각과 달리 그는 점점 기분이 안 좋아진듯 했다.
더 격렬하게 나무를 흔들거나 긴 나뭇가지로 손에 닿지 않는 호두를 쳐서 떨어뜨렸더니
그는 내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내게 그런 얘기를 한 것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누군가에게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적이 여러 차례있었다.
그들에겐 일거리를 만들고 고생을 사서하는 내가 피곤하고 융통성없고 생각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사람을 평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어쩌겠는가.
상대가 하기 싫다면 혼자라도 하겠다는데 왜 그렇게 저지하는지 모르겠다.
할 일을 했다고 그에게 어떤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 행동을 막을 권리는 없지만 그것 또한 어쩌겠는가.
호두수확보다 관계가 우선인 것을.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고 감정의 변화가 생기고 쌓여가면 언젠가 그 관계에 대해 지쳐버릴지도 모르겠다.
결국 수확을 그만두고 마당에 호두를 널었다.
예상과 달리 펼쳐보니 양이 얼마 안됐다.
그 날이후 나무에 달린 잘 익은 호두가 자꾸만 눈에 띄고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까매진 손은 어찌할 수 없었지만 여행이 끝날때즈음이면 이 흔적도 근질거리는 병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호두수확이 끝나고 다음 작업으로 이어졌다.
공간을 정리하기 위해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필요없어진 나무를 미휄이 전기톱으로 자르는 동안
우린 그중 살아남은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거름을 주었다.
거름의 재료는 수확하고 남은 아몬드 껍질로, 수십포대에 나뉘어 담겨있었다.
케이시가 머무는 동안 깐 아몬드라고 했다.
포대자루를 옯겨 나무 주위에 동그랗게 뿌리는 간단한 일이지만 많은 힘을 필요로 했다.
포대는 무겁고 옮기는 동선은 길고 땅은 울퉁불통하고 가시풀이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옷에 달라붙어 따끔거렸다.
농장에서 했던 일 중 가장 힘든 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쉬고 있으라고 했지만 도움이 되고자 포대자루를 수레에 실어 옮기기로 했다.
그는 각 나무 아래에 옮겨진 포대의 양 끝을 잡고 나무를 한 바퀴 빙 둘러 아몬드 껍질을 보기 좋게 깔았다.
포대 나르기가 점점 힘에 부칠수록 그와 미쉘에게 서운해졌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이 농장에는 여태껏 방문했던 헬퍼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케이시가 깐 아몬드껍질도 그러했고, 창고에 쌓아둔 백 개는 돼 보이는 술병들과 낡은 자전거,
돌담과 장작을 쌓아 만든 울타리, 집 뒷편의 타일로 만든 '에코' 모자이크 등이 그렇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어떤 흔적이 남을까.
아마도 나무 주변에 곱게 깔아놓은 주황빛 아몬드껍질이 색을 잃기 전까지는 '우리가 있었다'는 흔적이 되지 않을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 흔적 하나를 남기기 위해 마지막 포대까지 옮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니 아침식사도 못먹었다.
아몬드껍질을 마저 뿌리는 동안 미쉘은 늦은 점심식사를 준비하러 먼저 올라갔다.
냉장고도 없으니 어제 산 고기를 빨리 해치워야 했기에 바베큐를 하기로 했다.
미쉘이 어딘가에서 오래된 바베큐세트를 가져왔다.
그릴은 미쉘이 농장에 오기 전부터 있던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 닦아낼 수 없을 정도로 녹이 슬어있었지만
그는 한 시간에 걸친 철수세미질 끝에 쓸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미쉘은 불을 피우고 나는 야채를 씻어 손질했다.
그가 그릴을 닦는 동안 미쉘이 흙바닥에 떨어뜨렸다가 그대로 다시 구운 가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언젠가 제주도 흙돼지 집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무데나 피어있는 로즈마리를 꺾어와 고기 위에 올리고
쌈에 싸서 먹을 야채로 루꼴라도 따왔는데 루꼴라가 아니라고...
미쉘이 다시 가져온 루꼴라는 내가 따온 것과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우리가 사는 자연에 대해 아는 것은 멋진 일이다.`
간혹 나무나 잎사귀만 봐도 그것이 어떤 나무인지 귀신같이 알아맞추는 '사람들이 있다.
자몽이 그러했고, 그도 그렇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한 사람을 만난 이후로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것보다 자연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갑자기 영화 'INTO THE WILD'가 떠오른다. 영화 주제와는 별개의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유명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지식인이었으나 독버섯을 먹고 죽지 않았는가! 하하)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싱싱한 상추에 쌓아 입에 쏙 넣는다.
미쉘의 밭에서 가져온 동그란 가지는 꿀고구마처럼 달았고 숯불 향이 났다.
모두 배가 고파서였는지 맛있어서였는지 '좀 많이 샀나'했던 고기는 세사람의 배를 채우기에 턱 없이 부족했다.
대신 후식으로 미숫가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