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61]리도 아레넬라
2016.09.15
밤엔 그렇게 서늘했던 동네가 아침이 되니 평화롭기만 하다.
이렇게 곳곳을 떠돌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낯선 장소에 대해 쉽게 겁을 먹는 편이기도 하다.
다른 한 편으로 세상 어느 곳이든 사람 사는 곳인데 뭐 있겠어? 하고 담담하기도 하다.
(가끔 상상은 나의 거대한 적이되기도 하니, 그 적을 무찌르기 위해 현실화가 필요한 것이다)
여튼 요즘 나는 참으로 모순적인 면이 많은 사람임을 느낀다.
동네 아주머니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가 노숙 동양인(우리)을 발견하고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탑을 산책시키려고 데리고 나가자, 동네 개들이 몰려들었다.
우리가 뭘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아주머니는 다 자신의 개들이라며 건드리지 말란다.
우리가 우리에게 딱히 뭘하지도 않았던 집시들을 미리 경계했듯 아주머니도 우리가 그러했나 보다.
주변에 바에서 커피와 브리오쉬로 아침을 먹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이 리도 아레넬라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러브스시의 지인이 말한 것 처럼, 수영하기에 딱 좋은 장소라 파라솔과 썬베드 두 개를 빌려 해수욕하기로 결정했다.
생각보다 물은 따뜻했고 아무리 멀리까지 가도 깊이가 얉았다.
때마침 해도 쨍쨍해 바다에 들어갔다 나와도 몸이 금새 말랐다.
탑을 풀어줄 수 없었던게 안타까울 뿐.
혹시나 이럴 때 쓰일까 하고 챙겨온 잠수안경세트를 쓰고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여겨왔던) 바닷속을 들여다 보았다.
수면 경계면을 기준으로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어느 여름 해변가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깃소리, 파도소리, 바람소리 그러한 것들이 바닷속에서는 무(無)가 되었다.
들려오는 것은 고작 나의 숨소리와, 꼬르륵 거리는 물소리뿐이다. 물고기들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유유히 헤엄쳐 다녔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 아무런 감촉도 느낄 수 없이 재빠르게 지나갔다.
사람들이 뭔가 닿았다며 놀라진 않았을까 수면 위를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놀이를 하고 있기를 반복했다.
어쩌면 그것들은 적어도 물 속에서만큼은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는 투명魚가 아닐까.
나는 그것들을 따라다니며 지켜보았다.
어떤 물고기 하나가 말미잘을 뜯어 물고 가자 다른 고기들이 먹이를 빼앗기 위해 그 뒤를 따랐다.
커다란 말미잘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말이다.
어떤 '것'은 생명을 다하고 바다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물고기가 죽으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물고기들은 죽은 것의 육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계속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등골이 서늘해져 물 속에서도 얼굴이 달아오는 것을 느껴졌다.
황급히 자리를 뜨려했지만 늪에 걸린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작은 바위 틈이 커다란 세상 속이었다.
태어난 모든 생명이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편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정작 죽음이 눈 앞에 왔을 때에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있기는 있을까.
(그래도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테지만)
어릴 적, 일찍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하곤 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그냥 그대로 無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기왕 살아있는거 (내 기준에서)'잘 살아보자'고 생각한 이후부터는
(가끔씩 그러한 생각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삶에 나를 전부 쓰기로 정했다.
한번쯤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들, 수많은 흘려가는 것중 생각이 멈추는데에는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것을 하며 살아보기로, 그러면 조금은 삶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내가 다가오는 그의 다리가 보이자 나는 곧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썬베드 위에 누워 챙겨온 손바닥만한 잡지 중 가장 좋아하는 부분만 골라 읽기 시작했다.
묶여만 있는 탑이 안쓰러워 잠시 산책을 다녀온다던 그는 삼십분이 흘러도 오지 않았다. 라이터라도 두고 갔으면 나았을 뻔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온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해안가 끝에 있는 곳을 가리키며 아주 멋진 곳을 찾았다고 했다.
한 시간동안 기다리고 있었을 난 한번도 떠올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치자 화가 났다.
카메라와 부러 하나 밖에 없는 라이터챙기고 한 시간동안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가시밭도 있으니 조심히 다녀오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의 모습에 더 화가 났다.
그와 있으면 금새 서운해지고 한 곳에 있자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 두가지로부터 떠나오니 금새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서운함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어쩌면 그와 나는 홀로 있을때에 가장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운함이 사그라들고 그가 걸었을 길을 홀로 걸었다.
그가 말했던 동굴이 이걸까, 돌아가면 물어볼 생각에 사진을 찍었다.
꽤 멀리까지 걸어왔다.
해안가의 사람들은 거의 안보일 정도의 점이 되었다.
앞서 가는 사람은 분명 동양인이었다.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동양사람을 보니 좀 놀랐다.
그도 나를 발견했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말을 주고 받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동양인이지만 우리는 다른 언어를 사용할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다음 해안가 끝 마을쪽으로 가는걸 보니 저곳에 사는 사람일까.
계속해서 돌아보는 그가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자, 여기서 그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안의 끝에 서서 한참 사진을 찍다 뒤를 돌았다.
좀 전의 동양인이 바로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것만 같았다.
때마침 어디에선가 불쑥 파란옷의 아저씨가 나타났다.
동양인도 다시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 별 의도 없었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파란옷 아저씨의 뒤에 바짝 붙어 재빨리 걷기 시작했다.
아니, 너무 빨라도 안될 일이어서 아저씨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그를 지나쳐 더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안심하고 느긋하게 걸었다.
아저씨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나를 향해 웃어보이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어딘가를 향해 힘차게 걸었다.
아저씨가 앞서 갔는지 내가 앞서 걸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마음 편히 걷다가 그가 기다리고 있을 파라솔로 돌아왔다.
알고보니 파란 옷의 아저씨는 우리 바로 옆의 파라솔에 있던 사람이였다.
마치 우리만의 비밀을 공유한듯 아저씨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돌아왔을 때 탑은 머리는 햇빛에 노출된 채 썬베드 윗부분에 누워, 그는 탑의 둔부를 베개삼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