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58]에트나에서
2016.09.12
바가 문을 열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커피 한 잔씩 주문했다.
바 한편에 걸려있던 에트나가 폭발하는 사진 아래에는 년도가 적혀있었다.
영화같은 장면이 이곳에서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졌다.
가장 최근의 폭발은 1994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에트나 어디에선가 매일 계속해서 분출이 있다고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바있다.
<1985>
<1997>
어제까지만해도 에트나에 오를 생각이 없었지만 새벽부터 산에 오르는 등산객들을 보자 우리도 자연스럽게 올랐던 것 같다.
투어는 중간까지 리프트를 타고 가서 이후부터는 산악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리프트 가격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우리는 리프트보다 산악용 바이크가 마음에 들었지만 양쪽 다 무리가 있어
튼튼한 다리로 걸어올라가는 방법을 택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등산복과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컨버스에 반바지를 입고 산을 오르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등산복과 흡사한 옷으로 골라 입었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 만큼 고된 등산이 아니었기에 평상복으로도 무리는 없었다.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니 등산길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산행이 시작되어 목줄을 풀어주자 탑은 앞에 가는 젊은 연인을 굳이 따라다니며 짖어댔다.
조금 올라갔을 즈음 예수상이 있어 내용을 읽어보았다.
1976년 2월 29일, 아마도 산과 눈과 운동을 사랑했던 누군가가 조난을 당했던 모양이다.
이제는 영원히 잠든 안토니아 스피나를 기리기 위해 그녀를 사랑했던 이가(아마도 부모님이지 않을까) 추모비를 세운듯 하다.
언젠가 'into the wild'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실제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 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하던 젊은이가 독버섯을 먹고 죽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그는 육체는 고통스럽지만 (그의 삶에 만족한듯) 미소띤 채 생을 마감했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온몸을 다 바쳐 꿈, 자유를 이룬 자만이, 자신의 삶을 살아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경지 혹은 죽음과 마주했을때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해석했다.
그는, 그녀는 마지막 순간무엇을 떠올렸을까.
(그것은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낸 자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가파른 산을 오르니 어느새 추위가 가고 겉옷을 벗어 허리춤에 묶었다.
목을 축일 겸 잠깐 쉬려고 앉았다. 탑 등에는 언제부터 따라올라 왔는지 모를 무당벌레 한 마리가 무임승차를 하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식물하나 없는 이 험한 곳의 어디서 온 것일까.
한 시간 반정도 걸으니 푸니비아 터미널(해발 2500m)이 안개에 가려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1900m에서 출발했으니 600m를 올라온 셈이다.
투어를 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지프차로 갈아타고 해발 2920m의 Torre del Filosofo까지 올라가는듯 하다.
그곳에서 부터 약 400m를 더 오르면 정상(3345m)이나 그곳까지 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해가 비췄다 구름이 가득했다 수시로 바뀌는 날씨와 바람 탓에 금세 추위가 온몸을 휘감았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몸을 녹일 겸 휴게소에 들어갔으나 정작 지갑을 차 안에 놓고 오는 바람에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실 수 없게 되었다.
휴게소에서는 등산복, 마그넷, 초콜렛 등 여러가지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 중 우윳빛깔이 나는 리큐르가 내 주의를 사로잡았다.
입구에서 시음할 수 있도록 아주 소량의 리큐르를 플라스틱 컵에 나눠줬는데 달달하고 향긋해서 한동안 그 앞을 서성였다.
아마 지갑을 가져왔다면 카드로 긁었을뻔 했다.
여기서부터 다음 지점까지는 35분, 지프차 도착지점까지는 약 두시간이 걸린다.
조금 더 올라가 분화구를 보고 싶긴했지만 '산은 밑에서 올려다 보는 것'이라고 누누히 얘기하는 그가 이만큼 배려했으니
더 이상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은 편한듯 싶지만 산이 무척 가파른만큼 쉽지 않았다.
탑은 위험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한참 앞에 가다가도 우리와 멀어지면 다시 돌아오거나 주변을 탐색하며 우리가 노기를 기다렸다. 녀석은 아마 우리가 걸은 만큼의 열 배는 걸었으리라.
저멀리 유독 풀이 무성한 곳이 보였다. 먼저 가던 탑이 어쩐지 더 이상 가지않고 주춤하며 돌아왔다.
녀석은 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가시에 발을 찔려 더 이상 갈 수 없어 안절부절했던 모양이다.
조금스럽게 빈 틈을 찾아 발을 디디던 나와 달리 그는 녀석을 안고 과감하게 가시밭을 헤쳐나갔다.
가시를 피해 앉았다. 녀석도 겁이 나는지 그가 바닥에 깔아준 배낭 위에 올라가 살포시 앉는다.
다시 길을 걸었다. 까끌한 화산모래와 바위에 이젠 녀석도 발바닥이 아픈지 뒷 발을 하나씩 번갈아 들고 어색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는 녀석이 안쓰러워 남은 길을 들쳐엎고 남은 길을 걸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쉬는 틈 없이 시라쿠사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지나는 길마다 쓰레기가 마구 버려져 있었다.
자신이 사는 곳을 쓰레기 더미로 만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쓰려했지만
나 또한 쓰레기를 만드는 일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그러한 것은 인간뿐일 것이다.
귀찮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분리수거라던가)부터 시작해 점점 나아갈 필요가 있다.
시라쿠사 어디에서 노숙을 해야하나 고민하다 오늘은 산행도 했고 빨래도 하고 씻을 필요가 있어 비앤비를 찾기로 했다.
시라쿠사에서 20분쯤 떨어진 곳에 아주 저렴한 방이 있어 호스트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다행히 금세 답장이 와 1박당 25유로로 2박을 하기로 했다.
다만 100유로의 보증금이 필요해 하는 수 없이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받게 됐다.
삼층으로 된 건물은 호스트 할아버지의 소유로 3층은 옥상, 2층은 집, 1층은 사무실로 쓰신다고 한다.
방을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집 전체를 빌리는 것이 아니어서 쉐어를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을 잠그면
방으로 만든 거실과 부엌, 화장실을 비로깔레(분리형 원룸)처럼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이한 구조의 집이었다.
다급하게 오신 할아버지는 어디에선가(아마도 근처에 있는 할아버지 집인듯 싶다) 아이스티와 쿠키를 가져오셨다.
그 때 먹었던 코코넛 쿠키의 맛을 잊을 수 없어 가는 곳마다 찾아보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웬만한 호텔 값이 1박에 100유로가 넘는데 25유로에 호텔보다 아늑한 주방과 주방용품, 세탁기, 할아버지의 친절까지,
뜻밖에 보물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결론은 할아버지는 숙박업계의 프로였다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비앤비를 하게 된다면 할아버지처럼 운영하리라)
식량을 담아둔 가방을 풀어 오랜만에 파스타를 해먹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따뜻한 물에 마음껏 샤워도 하고 탑을 씻겼다.
보통의 생활에서는 빨래를 하고 밥을 해먹고 씻는 것에 행복함을 느끼기 어렵지만 여행에서는 기쁜 일이 된다.
또 한가지, 평소에는 핸드폰 혹은 티비를 보며 밥을 먹거나
한 사람이 다 먹으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여행하는 동안은 서로를 보고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한다.
밀라노로 돌아가서도 그가 이 순간을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다.
앞으로 보름은 더 살아야하지만 보증금을 제외하면 이제 정말 여행자금이 똑 떨어졌다.
일단 복잡한 일을 잠시 미뤄두고 쉴 수 있을 때 몸도 마음도 푹 쉬어둬야 겠다.